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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 작품을 찬찬히 읽어본 것은 부끄럽게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책속에는 그의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과 생각들이 듬뿍 들어있었고, 책을 읽는 사람에게까지 그 온화함이 물드는 기분이었다.
일을 하면서 평소에 느꼈던 자신의 감수성과 감수성을 어딘가에 발휘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사라진 줄만 알았던 감수성이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특별한 책 중 하나로 기억할 느낌이다. 그 이유는 책 속의 문장들에게 그의 온화함을 듬뿍 전달받았기 때문이고, 감수성을 다시 어딘가에 발휘하고 싶다는 나의 욕심에 불을 지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큰 나머지 이유는 이 책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추천해주고, 심지어 좋은 목소리로 읽어주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성격 파산자들이라 하여, 또는 신문 3면에는 무서운 사건들이 실린다 하여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소설감이 되고 기사 거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

*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내게 효과가 있는 다만 하나의 강장제는 따스한 햇볕이요, '토닉'이 되는 것은 흙냄새다. 이제는 얼었던 혈관이 풀리고 흐린 피가 진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젊음'이 초록빛 '슈트케이스'를 마차에 싣고 넓어 보이는 길로 다시 올 것만 같다.

*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 여성의 미는 생생한 생명력에서 온다. 맑고 시원한 눈, 낭랑한 음성, 처녀다운 또는 처녀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 민활한 일솜씨, 생에 대한 희망과 환희, 건강한 여인이 발산하는, 특히 젊은 여인이 풍기는 싱싱한 맛.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 나타나는 윤기, 분석할 수 없는 생의 약동, 이런 것들이 여성의 미를 구성한다.

* 여성의 미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약방문은 없는가 보다. 다만 착하게 살아온 과거, 진실한 마음씨, 소박한 생활 그리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희망, 그런 것들이 미의 퇴화를 상당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 선물은 뇌물이나 구제품같이 목적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다. 구태여 목적을 찾는다면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선물은 포샤가 말하는 자애와 같이 주는 사람도 기쁘게 한다. 무엇을 줄까 미리부터 생각하는 기쁨, 상점에 가서 물건을 고르는 기쁨, 그리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 인편이나 우편으로 보내는 경우에는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상상하여 보는 기쁨, 이런 가지가지의 기쁨을 생각할 때 그 물건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 전화는 걸지 않더라도 언제나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 그 가치가 더 크다. 전화가 있음으로써 내 집과 친구들 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못 든든할 때가 있다. 전선이 아니라도 정의 흐름은 언제 어느 데서고 닿을 수 있지마는.

*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 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따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적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 '일단사 일표음'(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박 물)으로 나는 도를 즐길 수는 없다. 나는 속인이므로 희랍 학자와 같이 자반 한 마리와 빵 한 덩어리로 진리를 탐구하기는 어렵다.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물론 마음의 자유를 천만금에는 아니 팔 것이다. 그러나 용돈과 얼마의 책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마음의 자유를 잃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

*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형은 한 중국 여동학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심이라는 아호를 지었습니다. 타고 남은 마음이라고.

* 그의 수필의 소재는 다양하다. 그는 무슨 제목을 주어도 글다운 글을 단시간에 써 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하나 보다. 평범한 생활에서 얻는 신기한 발견, 특히 독서에서 오는 풍부하고 심각한 체험은 그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그가 타고난 예민한 정서, 예리한 관찰력, 놀랄 만한 상상력, 그리고 그 기억력의 산물이다.
~
또 "조약돌 같은 인생. 다시 조약돌을 손에 쥐고 만져 본다. 부드럽고 매끄럽다. 옥도 아닌 것을 구슬도 아닌 것을, 그러나 옥이면 별것이요 구슬이면 별것이냐. 곱고 깨끗한 것이 부드럽게 내 손에 쥐어지면 그것이 곧 옥이요 구슬이지."

* 멋이 있는 사람은 멋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작고 이름지을 수 없는 멋 때문에 각박한 세상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바라다보고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말주변이 없어" 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 둔한 사람이다'하는 소리다. 화제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불투명한 사고방식에 있다.

*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산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야기로 되어 버린다.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 끊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것은 20여 년 전 명월관에서 한때 제일 유명하던 기생이 따라 주던 술을 졸렬하게 안 먹은 것이요, 한번 어떤 미국 친구가 자기 서재 장 안에 비장하게 두었던 술병을 열쇠로 열고 꺼내어 권하는 것을 못 받아 먹은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수 있는 술을 안 먹은 것, 앞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고 떠나는 그 분량은 참으로 막대한 것일 것이다. 이 많은 술을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인지, 또는 그만큼 생산을 아니하게 되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 우리 모두 여린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인생은 좀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 부부는 일신이라지만 두 사람은 아무래도 상대적이다. 아버지와 달라 무조건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언제나 마음을 같이 할 수는 없다. 제 마음도 제가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이 한결같을 수야 있겠니?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기분이 맞지 않을 수도 적은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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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온 남편의 안색이 좋지 않거든 따뜻하게 대하여라. 남편은 아내의 말 한마디에 굳어지기도 하고 풀어지기도 하는 법니다.
같이 살아가노라면 싸우게도 된다. 언젠가 나 아는 분이 어떤 여인 보고, "그렇게 싸울 바에야 무엇하러 같이 살아 헤어지지" 그랬더니 대답이 "살려니까 싸우지요. 헤어지려면 왜 싸워요" 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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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결혼 행로에 파란 신호등만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려움이 있으면 참고 견디어야 하고, 같이 견디기에 서로 애처롭게 여기게 되고 더 미더워지기도 한다. 역경에 있을 때 남편에게는 아내가, 아내에게는 남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같이 극복해 온 과거, 옛 이야기 하며 잘 산다는 말이 있지.
결혼 생활은 작은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긴긴 대화다. 고답할 것도 없고 심오할 것도 없는 그런 이야기들...
부부는 서로 매력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지성인이 매력을 유지하는 길은 정서를 퇴색시키지 않고 늘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며 인격의 도야를 늦추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은 충실히 살아온 사람에게 보람을 갖다 주는 데 그리 인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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