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대리석같은 차가운 느낌이 드는 하얀 표지에 흰, 이라는 또박또박한 글자. 호기심에 쥐어본 책에는 정말 흰 것에 대해 써내려간 단정한 문장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흰 것에 대한 단상 그 이상이 담겨있음이 분명하다. 글을 읽는 내내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를 떠올렸고, 명치 한 켠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려왔다. '죽지 마라 제발, 제발 죽지 마.'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는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떠나갔던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도 분명 그렇게 얼굴이 희었을 것이다. 마주한 적 없지만, 전파의 틈으로만 얼굴을 살짝 보았을 뿐이지만, 분명 그렇게 하얀 생명이었을 것이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이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의 이층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열 살 무렵이었다. 막내고모를 따라서 처음으로 커피숍에 갔을 때 그녀는 각설탕을 처음 보았다. 흰 종이에 싸인 정육면체의 형상은 완벽할 만큼 반듯해, 마치 그녀에게 과분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벗겨내고 하얀 각설탕의 표면을 쓸어봤다. 귀퉁이를 살짝 부스러뜨려보고, 혀를 대보고, 아찔하게 달콤한 표면을 조금 갉아먹고, 마침내 물잔 속에 넣어 녹는 과정을 지켜보는 탐험을 했다.
이제 그녀는 더이상 단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 Total
- Today
- Yesterday
- 익숙한 새벽 세시
- 인문학도서
- AbyssRium 공략
-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
- 자기계발도서
- 가정살림도서
- AbyssRium
- 고슴도치의소원
- 경제경영도서
- 소설 추천
- 연인선물
- 어른동화
- 미니멀라이프
- 에세이 추천
- 에세이추천
- 오지은
- 책
- 기념일선물
- 어비스리움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